*원작축 *모브 시점
전장에 날리는 흙먼지가 무색하게도 참호에서 문득 올려다보는 이국의 하늘은 늘 눈이 아릴만큼 파랬다. 레벨리오 구의 칙칙한 그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작은 수용구에 겹겹이 쌓인 피차별민들의 만성적 우울은 어느새 실체를 가지게 되어 공기 중에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것은 왜인지 하늘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조금 더 잿빛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그 무채색의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이가 차자마자 냉큼 엘디아인 일반병 전사대의 일원이 된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흙바닥에 누워 옆구리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걸지도.
“의식은 있나?”
몽롱해 흐릿해진 눈으로 초점을 잡으려 노력하자, 가까이 다가온 선이 딱딱한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브라운…부장님,”
“가능한 한 말은 하지 말도록. 목숨을 잃을만한 부상은 아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면서 내 허리를 세 번 정도 감은 붕대를 강하게 당겼다.
“…윽!”
이건 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총알이 스치는 것이야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그것을 응급처치 해주는 상대가 내 근처에서 거인화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던, 마레를 지키는 방패이자 모든 엘디아인 병사의 선망의 대상―라이너 브라운 전사부장인 것은 말이다. 무엇보다도 총탄이 지나간 장소가 두개골이나 가슴 한 가운데가 아닌 것부터가 수많은 동포들이 누리지 못하고 죽어간 행운이었다.
“라이너 씨, 부상자들은 저와 후보생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라이너 씨는 갤리어드 씨와 피크 씨에게 합류해주세요.”
“콜트. 알았어. 그럼 부탁한다.”
“라이너, 조심해!”
“그래.”
내 흐려진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두 세 사람이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 후 부장은 나를 똑바로 기대어 눕히고는 숨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와 있던 몸을 떼어냈다. 이윽고 아까보다 조금 작은 손들이 나의 목을 받치며 몇 마디 걱정하는 말들을 건네주었지만 내 정신은 미처 그것을 듣지 못한 채 그대로 암흑 속에 잠겼다.
레벨리오의 주민들은 지성 거인 전사들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품고 있다. 그들이 수명을 깎아 괴물이 되어가면서까지 지키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가족이고 또 이 나라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그러니까 마레 내 엘디아인 동포들이 치러야 하는 빚을 어깨에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길을 걸으면 이 작은 마을의 모든 구성원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들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네고 응원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 감사와, 미안함과, 선망과, 조금의 경외를 담아.
‘안녕하신가, 우리의 전사여.’
그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도통 그런 존경의 대상에게 그렇게 자연스레 친한 척 굴만큼 친화성 좋은 성격이 되지 못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겨우 세 해 전만 해도 함께 인간의 몸으로 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인 ‘턱 거인’ 포르코 갤리어드 씨 정도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갤리어드 씨! 마침 잘 만났네요. 이 보고서 좀 작성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고서? 어디 봐.”
어제 있었던 전투로 환자가 급증하여 처리해야할 서류 또한 환자의 수만큼 늘어났다. 저번 아르트빈 참호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갑작스레 후방으로 밀려나 행정보직으로 일하게 된 나로서는 이렇게 몰아치는 서류의 산 따위 도저히 혼자서 처리할 길이 없었다.
“예, 제 권한으론 작성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나보다 2, 3센티는 작음에도 전혀 올려다보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어깨를 편 그가 서류를 대충 훑어보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올려진 호박색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한 가닥 떨어졌다.
“쯧. 이런 건 피크나 전사장이 잘하지, 난 영. 그 둘한테 부탁해.”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툼한 서류첩을 가슴에 안고 조금 부자연스레 경례를 한 뒤 그 자리를 뜨려던 차에, 갤리어드 씨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아, 아니다. 야. 저기, 누구더라. 너. 그 보고서 다시 줘봐.”
“앗, 넵! 여기 있습니다.”
“오늘까지 끝내면 되는 거지? 할 것도 없는데 이거나 쓰고 있어야겠군.”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갤리어드 씨는 이미 용건은 끝났다는 듯이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저벅저벅 복도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쪽은, 그러니까…아마도 일반 6인 병실이었던가. 그러나 웬만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군 관할의 대형 병원으로 소속을 옮겨 그 쪽으로 이동된 지금, 침대나 몇 개 겨우 놓여있는 게 시설의 전부인 이 병영의 작은 병실에 남아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브라운 부장이 이번 전투에서 양 다리를 잃는 부상을 당했다고 하던데….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는 지성 거인의 특성상 아직 그 병실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갤리어드 씨는 그런 브라운 부장을 간호해주려는 것일까. 간호? 무엇을 위해? 내가 알기로는 그냥 가만히 며칠 정도 푹 쉬면 도롱뇽처럼 자연스레 다시 육체가 돋아난다고….
도롱뇽….
자신이 생각한 단어지만 괜스레 닭살이 돋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결정적으로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실감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접했을 때의 감각이 피부 위를 기었다.
피를 조금 흘리는 것만으로 거대한 괴물로 변할 수 있고, 손을 휘두르면 몇 명의 인간이 짜부라지고 터져나가며 죽어가고, 뭉그러지고 잘려나간 인체의 말단이 다시 새 것처럼 자라나는 삶이란 것은 어떤 느낌일까. 얼마나 인간과 동떨어져 있을까.
확실한 건 나는 평생 가도 이해할 수 없고, 그다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감정이란 것이다.
갤리어드 씨가 문을 닫고 들어간 병실의 문을 잠깐 응시하던 나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정도의 무해한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들여다볼까.
“어이! 일등병! 거기서 왜 멍하니 있어? 시간이 있으면 이거 옮기는 거라도 도와!”
복도 저 편에서 상사의 호령이 들려왔다.
“아! 예! 갑니다.”
못내 아쉬운 걸음을 떼며 나는 몇 번이고 닫힌 병실 문을 돌아보았다.
레벨리오로 돌아오는 것은 5개월 만이었다. 앞으로 한 달, 아니 이 주는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중동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상 언제 갑작스레 전선에 불려갈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다지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귀향의 기쁨을 누릴 겸, 오랜만의 휴일을 기념하려 버섯 스프를 끓이고 싶었던 나는 사복을 갖추어 입고 마을 중앙의 상설 시장으로 향했다.
“앗.”
시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작은 상점가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밀짚색 머리를 한 남자가 빵집 앞에서 진열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한 뼘은 키가 크기 때문인지, 우리 마레 군의 자랑인 흰 군복 때문인지, 멀리서도 그의 모습은 매우 눈에 띄었다. 평소 같으면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했을 나였지만 저번의 감사를 아직 하지 못했던 탓일까, 놀랍게도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떼어졌다.
“안녕하십니까, 브라운 부장님.”
“아…. 안녕하세요.”
진열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던 그가 내 인사에 허리를 펴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인지 파악하려는 듯 잠깐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나의 완장에 가서 멈추었다. 엘디아군 일반병이 차는 회색 완장인 것을 확인하자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아, 전사대인가.”
“조국 마레에 충성! 일등병 ――입니다.”
급하게 경례를 하는 나에게 그가 됐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사적인 장소니 경례하지 않아도 돼.”
“두 달 전 전투에서 라이너 브라운 부장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기에, 이렇게 경의와 감사를 담아 인사드립니다!”
“전투?”
역시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겠지.
“제가 전장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 응급처치를 해주셨습니다.”
“아,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그였지만 시선이 여전히 갈 길을 잃은 것으로 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나는 그가 들여다보던 빵집의 유리창 너머로 눈을 돌렸다. 싸구려 초콜릿과 과자가 담긴 양철 상자들이 놓여있었다. 동시에 수용구의 엘디아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디저트이기도 했다.
“뭘 보고 계셨습니까?”
“아……. 마침 잘 됐군. 갑작스레 미안하지만, 혹시 이 브랜드의 과자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나?”
그가 다른 쪽 손에 가지고 있던 납작한 진갈색 젤리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냥 흘긋 봐도 마감이 잘 되어있는 로고의 인쇄면이나 상자의 질감은, 도저히 레벨리오 구의 작은 빵집에서 구할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보고도 한 눈에 알지 못하다니……. 역시 전사대의 2인자이고 모두의 선망의 대상인 ‘갑옷 거인’도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갓 스물의 청년일 뿐인가.
“이건…. 저도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레벨리오에서 구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동 특산품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급 젤리인 것 같은데…. ”
“이게……, 고급품인가?”
“예, 몹시….”
브라운 부장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눈에 띄게 곤란해 하며 상자와 진열대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실례되지만 무슨 일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으음,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인데 전쟁이 바빠 잊고 있다 보니 레벨리오에 도착해 짐을 풀다가 겨우 발견을 해서…. 그런데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 버렸길래, 적어도 직접 먹어보고 감사를 전하고 싶어 같은 브랜드의 과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나는 뒷면에 적힌 날짜를 발견했다. 확실히 기한이 한 달 정도 지나 있었다. 열어보진 않았지만, 먹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군요…. 안타깝지만 다시 중동에 가기 전까지는 같은 물품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조언 고마워.”
“그럼, 이 상자는 제가 버려드리도록 할까요?”
말을 내뱉고서도 아차, 했다. 내가 뭐라고 감히…….
“으응…?”
“내용물은 먹을 수 없겠지만 상자가 고급스러워서, 속을 비우고 개인적으로 쓸 수 있다면…. 하고…. 역시 어렵겠죠?! 죄송합니다. 외람된 말씀을….”
부장은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자기가 더 당황해서 바라보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가져가서 사용해도 된다.”
“정말입니까!”
일반 병사인 나로서는 손에 넣기도 힘든 고급품을, 비록 겉껍데기뿐이라곤 한들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부장도 필시 이를 알고 있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선뜻 건네준 것이겠지. 명예 마레인인 그로서는 조금의 품만 들이면 금세 다시 구할 수 있는 물건이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본부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깍듯이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왜인지 모르게 등 뒤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은 부장의 시선이 잠시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뒤로 벌어진 긴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 내용물을 비우기 위해 상자를 연 나는, 생각보다 멀쩡한 고급 젤리를 눈앞에 마주하고 호기심과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한 개를 입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맛이 이상하면 바로 뱉으려는 생각이었음에도 혀가 아릴만큼 달고 말랑한 식감에 세 개를 앉은 자리에서 연이어 먹어치운 것이다. 전사대의 월급은 끼니로 말라비틀어진 베이컨과 퍼석한 빵을 살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로 쥐꼬리만 했기에, 내게 그 맛은 천상과도 같았다.
“으으으….”
그리고 그 짧은 일탈을 즐긴 업보는 다음날 낮 돌연히 찾아왔다. 본부의 작은 근무실에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어쩔 수 없이 회계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나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퍼뜩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기 ―― 병사 있나?”
“예에……. 무슨 일이십니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쥐어짜내는 내게 상사는 조금 당황한 눈빛을 던지더니 이어 용무를 말했다.
“브라운 부장께서 부르신다.”
“부르셨…습니까…….”
“갑작스레 호출해서 미안하다. 다른 게 아니라….”
본부에 그의 이름으로 할당된 방은 작고 깨끗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사람이 사용하는 근무실 같지 않았다. 있어야할 물건들도 없는 듯한 그런 헛헛하고 텅 빈 느낌이 뭔가 브라운 부장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준 그것…. 역시 안 되겠어. 정말 미안하지만 혹시 아직 버리지 않았다면 다시 돌려주면 고맙겠다.”
아아,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축축해질 정도로 흐른 식은땀 때문일까…….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면 그 때 꼭 기억해서 같은 물품을 구매해 주도록 할 테니….”
“죄송합니다…. 그, 이, 미, 먹…어버려서….”
“뭐…? 한 달이나 지난 건데. 몸은 괜찮은 건가? 아무튼 과자는 괜찮으니 상자만이라도 꼭―….”
……그의 낮은 목소리가 갑자기 귀에서 아득해졌다.
조금 건조한 세제향이 코를 간질였다. 뭔가 무거운 것이 내 위에 얹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장이 이따 저녁에 같이 수용구 밖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하더군. 그걸 전해주러 온 것뿐이야.”
“피크도 같이?”
“전사장과 나, 피크, 콜트 그리고 너 이렇게다. …그딴 것보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뭐냐? 저 녀석은.”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갑자기 번쩍 돌아왔다. 저 녀석이라니, 나를 말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분명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아, 갑자기 얘기하던 중 쓰러져서 말이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대체 누구신데 저렇게 소파에 네 코트까지 덮어서 놔둔 건데?”
“그냥…. 잘 모르는 병사.”
“하…!”
갤리어드 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군화를 몇 번 부딪혔다.
“……설마 잤냐?”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준 음식을 먹고 탈이 나서 기절을…. 그래서 최소한의 예의로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눕혀둔 것뿐이다.”
“하긴 너 같은 호모 새끼랑 그딴 짓을 할 놈은 우리 긍지 높은 전사대엔 없지.”
“……. ……어쨌든, 전사장에겐 그럼 이따가 뵙겠다고 전해주면,”
“음식 뭘 줬는데?”
이곳에선 당사자로서 일어나서 직접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서슬 퍼런 갤리어드 씨의 말투에 나는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
“또 거짓말 할 셈이군.”
“그냥, 아이들에게 주려고 사뒀던 쿠키가 남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무슨 사이냐고?”
“……갤리어드, 내 문제에 네가 이렇게 참견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뭐? 말 씨발 한 번….”
그와 동시에 뭔가가 와장창 넘어지는 소리가 나자 아무리 나라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이 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역으로 수상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다급히 코트를 밀어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뭐야?”
방금 쓰레기통을 발로 차 넘긴 갤리어드 씨는 순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가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 기세에 순간 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그런 나여도 총을 메고 전장에 나가 허리에 영광의 상처까지 입은 채 돌아온 악마의 후예였다. 할 말은 해야했다.
“갤리어드 씨…!! 저 알아보시…죠?”
그는 대답 대신 혀를 칫 차고는 더 얘기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부장님과는 어제 처음 이야기 나누어본 사이입니다. 기간이 지나 버리려는 식품을 대신 버려 드리려고 집에 가져갔다가 쉽게 볼 수 없는 고급 디저트라 그만…. 제가 멋대로 먹어버린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째서 나는 아직도 울렁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두 전쟁 영웅과 대면한 채 이렇게 어색하게 서 있어야만 하는 걸까. 갤리어드 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묵묵히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래?”
“예! 믿어주십시오.”
“그 디저트가 뭔데?”
브라운 부장이 나지막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내 입은 말을 뱉고 있었다.
“젤리….”
방 밖으로 쫓겨난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안에서 웅웅거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얼핏얼핏 연속되지 않는 음절들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웃기지……저딴….”
“…음부터……네가 단 건 싫…….”
하아…. 벽에 기대어 한숨을 쉬며 아까의 싸늘히 식은 분위기를 떠올렸다. 갤리어드 씨가 내 대답을 듣고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나직하게 내린 상관으로서의 명령을.
“나가.”
“네?”
“나가라고 너.”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부장 쪽을 쳐다봤지만 그 또한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적인 이야기다. 나가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에게 등을 보이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직 물건의 처리에 대해 부장과 할 말이 남아있는 이상, 쉬이 그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릴 거면 차라리….”
“……쟁 때문에…….”
드문드문 들리는 말에 다시금 궁금증이 치밀어 문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엘디아인의 프라이버시 따위 존중해주지 않겠다는 듯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얇은 벽에.
“…그래서 잘했다는 거냐?”
“…아니.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갤리어―”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앞으로 너에게는 쓰레기 찌꺼기든 뭐든, 동정으로라도 줄 일 없으니까 말야.”
“……알겠어.”
“진짜 넌 개좆같은 새끼야. 알기나 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쪽으로 사납게 걸어오는 군홧발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몸을 떼고 다치지 않도록 급하게 피하자마자, 경첩이 떨어져 나갈 만큼 강하게 문이 열어젖혀졌다.
“씨발 진짜….”
갤리어드 씨는 문 뒤쪽에서 당황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도 못한 듯 발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복도 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이미 코너를 돌아 뒷모습도 보이지 않게 된 그를 따라가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에, 열린 문에서 부장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직도 내가 거기 있었음에 꽤나 놀란 듯한 그였지만 이윽고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 왔다.
“…갑자기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 놀랐을 텐데. 그건 그렇고, 아까 부탁한 것은….”
“아, 예. 상자 말이죠. 내일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더니 어깨를 살짝 떨었다. 퀭한 두 눈에 오늘따라 한층 더 어둠이 짙어 보였다. 잠시 동안 공중인지, 갤리어드 씨가 걸어간 쪽인지 모를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나에게 들릴 듯 말 듯 가냘픈 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부에게서 강제로 받은 싸구려라서…. 단 게 싫으니까 주는 거라고……. ……그랬는데.”
내일 나는 부장에게 부탁 받은 상자를 돌려주고 이 일을 잊고 살아갈 것이다. 구태여 그러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그리 될 것이다. 십년만 지나도 죽어 없어질, 유통기한 짧은 전쟁 병기들 간에 놓인 감정을 평범한 사람인 나는 아마 알 수 없을 테니까.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저 늘 그렇게 그냥 우리를 지켜주는 괴물로, 경외와 선망의 대상으로만 남아주면 됐다. 인간이 아니라.
“…분명히 그랬는데…….”
그 혼잣말에 답변할 의무는 내게 없었다.
모브 시점으로 보는 최애컾을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