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스지 아키라 편 - 미도스지를 어렸을 때 괴롭혔던 남학생B (집단 따돌림 소재 주의)




증언 1 - 미도스지 아키라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자신의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서 그것을 자연의 이치, 순리, 혹은 본능이라고 일컫곤 한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말하겠다. 초등학교 시절 그 녀석이 괴롭힘 당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지금 이런 멋들어진 말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과 달리,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내가 그를 괴롭히고 따돌림을 주도한 것은 그런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행해진 것이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나는 그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는 하나도 없는 데다가, 늘 뭔가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체육 시간에도 젬병인 건 물론이거니와 평소에 끼리끼리 모여 놀이를 할 때도 남의 발목이나 잡는 애. 사람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빠른 년생이라 나이도 적은 데다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작고 체구가 조그마한, 무엇 하나 잘 하는 게 없는 무녀리 같은 놈. 얼굴 생김새도 하는 행동도 짓는 표정도 묘하게 기분 나쁘고 징그러워 인간 같지 않은 용모. 주먹을 들어 올리면 움찔하는 주제에 정작 우리를 보는 눈에는 일말의 공포도, 선망도 깃들어있지 않았던 녀석.


그때의 나도, 다른 누구도, 심지어는 그 녀석 자신도 그의 검고 커다랗고 징그러운 눈에 서려있던 그 감정을 정의 내리지 못했지만, 나는 이제야 그가 우리에게 품고 있던 감정의 편린을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일종의 경멸, 그리고 그에게 가해지는 각종 괴롭힘의 사이에서도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내주었던 어떤 우월감. 어렸던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눈빛을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피부로 느낄 수는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더욱 괴롭히고 미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당시 그 자식은 조금 성적이 잘 나오긴 했어도 지금처럼 특출나게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더욱더 그를 깎아내리고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를 따돌리는 데에서 오는 집단의식과 우월감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런 역겨움으로 점철된 우리의 우월감과는 달리, 그 녀석이 품은 우월의식은 무언가 달랐다.


「경륜이 아니라 로드바이크라고 하는기라! 자전거랑 자기 몸 하나만 가지고 하루에 100km 넘게 달리는 거데이. 세상에서 제일 가혹한 스포츠라고! 엄청난기다, 무지하게 빠르대이! 너희들은 절대 몰라!


실내화를 몰래 버리고, 체육 수행평가에 연달아 실패하는 것을 빙 둘러싸서 야유하고, 공책과 교과서에 사인펜으로 온통 낙서를 해놓고, 가방을 학교 뒤뜰 연못에 빠뜨리고, 우유를 던져 터뜨렸을 때도 징그럽게 가지런한 이를 뿌득이며 우리에게서 꼴사나운 등을 돌린 채 뒤처리나 했던.

그 자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반항 다운 반항을 한 것은 어느 날 우리가 그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을 조롱했을 때였다.


너희들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거기서 오는 감정이었다. 거기서 오는 우월감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



'우승'. 그 단어가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를 포함한 반 아이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에 홀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여러분, 미도스지군이 쿄토 자전거 경기 대회에서 초등부 남자 우승을 했어요. 학생들이 백 명도 넘게 출전했고 육학년 형아들도 나온, 큰 대회에요. 다들 박수를 쳐줍시다.」


떨떠름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한 우리들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리는 그때 그가 조금이나마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저 녀석도 입꼬리를 올릴 줄 아는구나. 멍하니 그렇게 생각한 날이었다. 우승했다. 승리했다. 오학년, 육학년 형들도 있는 큰 대회에서 누구보다 빨리 골에 들어왔다. 나에게는 그저 단어의 나열, 따분하고 시시한 문장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사실을, 그때의 벅차오는 감정을. 저 녀석은 느꼈을 터였다. 나와 반 아이들, 선생님조차 알 수 없는 그 감각을 오직 어린 그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아홉 살, 열 살 먹은 아이들이 품은 증오란 별것도 아니어서, 그가 자전거 대회에서 특출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로부터는 괴롭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돌렸던 것이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그만뒀다. 그저 그 정도의 놀이에 불과했다. 따돌림을 그만두자 관심도 식었다. 그 녀석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거나 늘 반짝이는 은색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기 시작했다는 몇몇 사실들은 우리에게 점심 메뉴가 브로콜리라는 것보다도 중요하지 않는 일들이었다.


*

미도가 요새 학교 안 온 이유 아나? 걔 엄마 죽었대!

뭐? 진짜가?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듯 서둘러 가버렸고 어느새 가을이었다. 반팔을 입으면 팔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가워 소매가 긴 옷을 꺼내 입을 계절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한 관심을 잃은지 오래였으나, 누군가가 가져온 새로운 소식은 반을 뜨겁게 달구기 충분한 소재였다. 교무실에 심부름을 갔다가 선생님의 대화를 주워들었다는 그 애는 신나게 입을 놀렸고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급우의 불행이 유희로써 소비되는 순간은 짧았고, 소문의 당사자가 앞문에서부터 비틀비틀 걸어들어오자 아이들은 입을 닫았다. 그 녀석은 울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고 다만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펴서 예습을 시작했다. 반은 아무 문제없이 굴러갔다.

그는 이후로 종종 텅 빈 눈으로 학교 뒤뜰에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보면서 멍하니 서 있다가 마침 지나가던 하급생을 놀래켰다.

그는 이후로 성적이 오르기 시작해서 2학기 기말고사에는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았다.

그는 이후로 갑자기 키가 자라기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키 순서대로 가장 첫 번째 줄에 앉아있던 그를 세 번째 줄로 보냈다.


교정에 흩어지는 벚꽃과 함께 나는 오학년이 되었다. 이제 드디어 고학년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바뀐 반에서 새 친구들을 사귀어 들뜬 기분에 복도를 열심히 뛰어다니던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그 녀석과 어깨를 부딪혔다. 갑자기 새로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놀 줄 아는 놈인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 나는, 근 반년간 그에게 한마디도 건 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엊그제 괴롭혔던 녀석에게 시비를 걸 듯이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야아, 이게 누구고! 미도 아이가? 얘들아, 니들 이 자슥 아나? 나 사학년 때 우리 반에서 완전 왕따였는데, 사람 눈도 못 마주치고...뜀틀도-」

「미도스지군이데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지금 나한테 말대꾸를?

「뭐? 머라했노, 니 지금?」

「미도는 무슨 미도? 니가 내 친구가? 이름 찍찍 불러 싸지 말라꼬.」


어느새 나와 거의 비슷하게 키가 커진 그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마지막 말을 뱉고는, 황당하게 서 있는 나와 친구들을 두고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낸 니 이름 모른다.」


*


나는 중학교 삼학년 때 반에서 이지메를 당했다. 그 이유나 괴롭힘이 행해진 방법은 굉장히 흔하고 또 대단치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진부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 괴롭힘은 진짜였다. 내가 초등학교 때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어떻게든 이지메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는 이 근방에서 제일 성적이 높은 아이들이 들어가는 학교를 진학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내 왕따를 주도했던 녀석들은 그다지 공부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교 홍보 책자의 열화판처럼 생긴 후시미 구의 고등학교 카탈로그를 뒤지면서, 나는 쿄토 후시미 고등학교라는 이름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쳤다. 운이 좋게도, 마지막 시험의 성적이 생각보다 높게 나왔고 나는 안정적으로 쿄토 후시미 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앞으로 달라질 고교 생활에 벅찬 가슴을 안은 채 입학식 날 강당에 앉아 있던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만고만한 키를 가진 학생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는 더 튀어나와있는 그는 나 말고도 다른 학생들의 눈길도 적지 않게 끌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알던 그와는 키도, 분위기도 꽤 달라져 있었지만 그 커다랗고 뒤룩뒤룩 굴러가는 어류 같은 눈과 소름 끼치게 가지런하고 촘촘한 이, 그리고 낮고 못생긴 코는 틀림없이 그였다. 공부를 잘 했으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이 학교에 진학했겠지.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라도 반 배정이 발표되고 나서는 조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가 싫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또 이지메를 당하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의 관전자가 된다면, 나는 그것을 버티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알량한 죄책감이 내 머리를 아프게 조여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늘 무서운 오오라를 풍기는 데다가, 전교 1등으로 들어와 입학 선서까지 한 우등생을 감히 괴롭힐 마음을 품는 녀석은 없었다. 나이가 하나둘씩 먹어가며 성적은 곧 권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녀석도 없었다. 나 또한 그에게 친하게 말을 걸 의리도, 용기도 없었으나 애초부터 그는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는 듯 보였다. 반마다 한 둘씩 있는 아무한테나 친하게 구는 녀석들도 그에게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마치 반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아침 자습시간부터 종례시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때때로 교사들이 그에게 발표를 시킬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학기 초, 교사들 특유의 입학 선서를 한 우등생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몇 번 겨우 생긴 일이었고, 선생들 또한 그의 예의 바르지만 절대 불필요한 말은 꺼내지 않는 철저히 계산된 거리감과 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렸을 때보다 더더욱 까매져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듯했다.


눈에 띄는 이지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급우들이 그에게 가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자리를 바꿀 때 그 녀석의 옆자리를 뽑은 애가 뒤돌아서서 분통을 터뜨리며 짜증을 낸다거나 그 친구들이 그 애를 위로해주는 일들, 또는 체육 교사가 자유 시간을 주었을 때 그만이 삼삼오오 모여서 노는 동급생들을 까만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구석에 혼자서 쭈그려 앉아있는다거나 하는 일들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나는 혼자 웅크려 앉아있는 그를 두어 번 더 돌아보곤 했지만, 결국은 친구들이 농구를 하자고 나를 부르면 금세 관심을 끄고 그쪽으로 뛰어가는 정도의 사람밖에는 되지 못했다.


*

「저기, 거기 너! 니 이 반이가?」

반으로 들어가려던 나에게 어디서 본 듯한 3학년이 말을 걸어왔다. 왁스와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듯한 시대착오적인 넘긴 머리와 이마로 흘러내려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에 이어지는 건 나라도 순간 감탄할 정도의 선 굵은 미남상의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과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간 깊은 눈, 그 아래로 쭉 뻗다가 코끝에서 완벽한 각도를 이루며 꺾어지는 코, 적당히 도톰한 입술. 가쿠란 아래에 감춰져있지만 꽤 탄탄해 보이는 몸까지. 요새 인기 있는 스타일의 얄쌍한 얼굴은 아닐지 몰라도 꽤 정통파 미남 배우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그 뒤로는 똑같이 3학년인 듯한 선배 두 명이 서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살짝 통통한 선배와, 볼살이 핼쑥하고 광대가 튀어나온 조금 음침한 인상의 선배였다.


「네, 그런디예. 무슨 일이십니꺼?」

「아, 맞나. 그르면 그, 혹시 이 반에 미도스지군이라고 있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기색을 눈치챈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잘생긴 선배가 다 안다는 듯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일단 내는 자전거 경기부의 주장, 이시가키 코타로라고 한데이. 공교롭게도 너희 반의 그 미도스지군이 우리 자전거 부의 에이스라서... 잠깐 부 관련해서 일이 있어서 온기다. 혹시 불러 줄 수 있긋나? 그, 아무래도 그 녀석을 부르는 건 불편하겠지만은... 3학년이 1학년 교실에 들어가면 벌점 받거든.」

이시가키 코타로.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는 듯한 이름이다. 우리 반의 여자애들이 몇 번 상기된 얼굴로 이 선배의 이름을 입에 담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과연, 이렇게 생긴 사람이라면 두 학년 아래인 우리 반 여학생들에게도 유명한 것이 이해가 갔다. 게다가 그 이름을 들은 것은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농구부의 친구들이 이시가키 선배,라고 몇 번 얘기를 나누던 것을 주워들은 기억도 있었다. 그때는 그저 농구부의 선배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전거 경기부였다니─ 게다가 그 녀석과 같은 부라니. 말이 없는 그 녀석을 다들 어르고 달래가며 부 활동을 겨우겨우 이끌어가는 이미지가 선히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생 때 그가 받았던 상장도 자전거 대회에서의 실적에 관련된 것이었던가.


「네, 알겠어예...」


대답은 했지만 그에게 말을 걸어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를 몰라 잠깐 망설이는 사이 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그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부르기도 전에 알아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르고 가는 팔다리를 휘적휘적 흔들며 한발씩 내딛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뭐꼬? 이시가키 군. 정신 나갔나?」

내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내게 등을 돌리고 선 그는 대뜸 이시가키 선배에게 독설을 내뱉었다. 선배에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순간 뻣뻣하게 굳었으나, 세 사람에게는 익숙한 일처럼 보였다.

「와 그러노, 미도스지군? 분명히 연습 매뉴얼을 줘야 하니 네 반으로 내려오라고...」

「주장만 내려오라고 했지, 내가 언제 이렇게 개떼마냥 사이좋게 우르르 모여서 오랬나? 1학년 교실 앞에서 3학년 세명이 문 막고 지금 뭐 하는 기가? 생각이 없는 거야, 뇌가 없는 거야?」


나는 당황하여 입을 몇 번 뻐끔댔다. 지금 내가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있는 것이 대체 뭐지? 이게 진짜 내가 아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남자란 말인가? 이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세 선배가 건방진 일학년의 뺨을 한 대 갈기는 대신 잠자코 눈을 내리까는 것을 보고 나는 또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발머리 3학년은 약간 주먹을 부르르 떠는 듯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건... 그, 셋이서 매점을 들르는 김 해서 온 거라서... 아무래도 층도 건물도 다르다 보니 그렇게 됐데이. 하여튼 그 점은 미안하다, 미도스지군. 그런데 매뉴얼은...」

「흥... 자, 여기 있어. 자쿠들한테 알아서 한 장씩 나눠주그래이.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쓸 시간은 내한텐 없거든. 그리고 그게 바로 주장이 해야 할 일이잖아? 푸푸.」

그는 한쪽 팔에 끼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대충 던지듯 이시가키 선배에게 건네주었다. 아까 나에게 말을 걸 때는 웃는 낯이었던 선배는 어느새 눈을 내리깔고 잔뜩 화를 삭이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이시가키 선배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 매뉴얼을 다른 두 사람과 나누어들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내 옆을 거칠게 스쳐 지나가는 세 사람이 '저 새끼 진짜 싸가지가...' '에휴, 가서 메론빵이나 사 먹자' '이시양 너무 속상해하지 말그래이' 하고 속닥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속닥이는 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너무 컸다. 마치 그보고 들으라는 듯이...


그 수군거림을 들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세 사람이 떠난 이후의 그 녀석은 평소의 조용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는 아직도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구부정한 등을 돌리고는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이후 내게 아주 조금 남아있던 죄책감마저 거두어들이기로 결심했다.


*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날, 그는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깎고 나타났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 방학이란 참으로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것인지라,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키가 10cm씩 크고 교정을 시작한 아이들이 반 한가득 앉아있는 상황에서 겨우 머리를 짧게 친 것뿐인 그는 딱히 눈길을 끌진 않았다. 나 또한 그 녀석의 머리 스타일 나부랭이보다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귀에 피어싱을 뚫었다는 것에 열 배는 더 관심이 간 것은 물론이다.


늦장마가 일주일째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봄 무렵부터 테니스부 활동에 설렁설렁 참가하고 있었는데, 초여름 즈음 남몰래 좋아하기 시작했던 3학년 매니저 누나가 수험기간에 접어들어 부를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들과 기분 전환 삼아 매점에 들르기 위해 교실을 빠져나오던 나는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아,」

이시가키 선배였다. 그러나 그 선배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 저, 내는 3학년의 이시가키 코타로라고 한대이. 혹시 너네 반에 미도스지 좀 불러줄 수 있겠나?」

그러고 보니 몇 개월 전 내가 이 선배와 처음 마주친 이후로도 이시가키 선배나 다른 2, 3학년 상급생들이 종종 우리 반에 들르는 것을 스치듯 본 기억이 있었다. 그동안 선배가 그를 찾은 것이 부 활동 때문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가을에 접어들어 3학년들은 거의 은퇴한 이 시기에 신교사에서 구교사로 건너오고 층을 두 개나 내려오면서까지 괴팍하고 건방진 1학년을 만나오러 온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에 드는 궁금증에 정신이 팔린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쾌활한 성격의 친구가 반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이, 미도스지군! 3학년 선배가 니 만나러 왔다아이가.」

그는 눈동자를 몇 번 뒤룩이더니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이 얼른 매점에 가자고 나를 재촉하는 친구들에 이끌려 계단으로 향하면서, 나는 두어 번 뒤를 돌아보았다. 막 자라나기 시작한 머리카락 때문에 뒤통수가 간지러운지 목을 긁적이며 이시가키 선배의 앞에 선 그는 뭔가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시끄러운 학생들 사이에 혼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책을 읽을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일 터인데, 그 새까맣고 생기 없는 죽은 물고기 눈 너머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깐, 방금 이시가키 선배가 저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건가?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카레빵을 한턱 쏘겠다는 친구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층계참으로 몸을 돌렸기에, 그 기묘한 광경은 금세 내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그 뒤로 이시가키 선배는 몇 번인가 우리 반에 찾아와서 그를 불러내었다. 오히려 여름 방학 전보다 잦아진 듯한 빈도에 잠깐 의문을 품은 적도 있지만, 그것을 몇 번이나 목격한 담임 선생님께서 3학년이 별 이유도 없이 1학년 반에 너무 찾아오지 말라며 선배를 크게 나무란 후에는 그런 일도 잘 없게 되어 자연스레 이시가키 선배와 그 녀석의 일은 내 관심에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

그 겨울 들어 두 번째 내린 눈이었다. 별로 대단치 않아서 이어서 내린 비에 전부 녹아버렸던 첫눈과 달리, 수업을 듣던 학생들의 집중력을 단체로 흐트러뜨릴 만큼 펑펑 내린 함박눈이었다. 점심시간, 다른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가 눈 뭉치를 던지며 놀 때 나는 학기 초 중앙 현관 눈 치우기 당번을 자원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반의 비품함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눈을 모으려는 용도로 쓰레받기를 하나씩 들고나간 건지, 도통 찾아도 제대로 된 것이 보이지가 않았다. 아래층에 쓰이지 않는 교실과 청소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나는 얼른 눈을 치우고 친구들과의 눈싸움에 합류할 작정으로 다급히 빈 교실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뒷문을 열려고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잡은 나는, 교실 안에 인기척이 있음을 알아채고 일순 놀라 숨을 멈췄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호기심이 일어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살짝 열고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밀회의 현장이라도 엿보는 듯한 긴장감이었다. 내게 등을 보인 채 앉아있던 두 사람은 둘 다 까만 가쿠란을 입고 있었다. 뭐야, 사내놈들인가, 하고 긴장의 끈을 놓으려던 내가 다시 한번 몸을 움찔 한 것은 그 두 명이 바로 그 녀석과 이시가키 선배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 둘이 눈이 이렇게 오는 날, 고등학교의 빈 교실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했던가. 그러나 이렇게 재미난 광경을 목격할 수만 있다면 두 번 죽어도 좋았다. 그들은 집에서부터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는 듯했다. 좀 더 귀를 기울이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대화도 들려왔다.


「미도스지. 이거 한번 먹어보그래이.」

이시가키 선배는 자신의 도시락에서 계란에 부친 두부 같은 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입맛에 맞나? 실은 이거 내가 한기다. 인스턴트 라면 말고는 처음 해 본 요리인데, 니가 맛있게 먹어주니께 억수로 기쁘대이. 앞으로도 점심은 니랑 내랑 이렇게 둘이서 먹자. 응?」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어느 쪽이 내 착각인지 모를 일이었다.


「잘 챙겨먹어야제, 미도스지. 내가 앞으로 이런 맛있는 것 많이 해줄게.」

「...이시가키군보다 내가 더 요리 잘 한대이.」

「하하, 그러게... 그럼 미도스지가 해줄래?」

「싫어... 귀찮아.」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평소에 선생님께 나지막하게 대답할 때의 그것과도, 그 초여름 반에 찾아온 선배들에게 폭언을 퍼부어댈 때의 그것과도 달랐다. 분명히 저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터인데, 두 사람이 앉은 이 어두컴컴한 교실의 창을 열면 문득 벚꽃잎이 휘몰아쳐 들어올 것만 같았다.


혀를 길게 빼고 입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던 그는 바닥에 실수로 반찬을 흘렸다. 조금 당황한 채 도시락 가방에서 휴지를 찾으려고 뒤적거리는 그를 부드럽게 저지한 이시가키 선배는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미도스지. 괜찮대이... 이따가 내가 치울테니께...」

그러니까, 하고 말을 이어가려던 선배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도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보였다. 이시가키 선배는 잘생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침과 함께 못다 한 문장들을 꿀꺽 삼켰다. 아니, 침을 삼킨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꽉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고 드디어 둘의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숨을 멈추고 다가가던 입술을 긴장시키며 겨우겨우 이루어낸 입맞춤은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했던 것보다도 몇 배는 서툴고 얕은 것이었다. 몇 초나 닿아있었을까, 먼저 얼굴을 뗀 것은 그 녀석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도스지, 좋아해.」


이시가키 선배는 아까보다도 훨씬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는 바늘에라도 쏘인 듯 약간 어깨를 떨더니 마주 입을 열었다.


「나, 도...」


그는 한 어절 한 어절을 입안에서 충분히 씹어뱉듯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이시, 가키, 군이...」


이시가키군이...

쾅!!


그는 한참을 문장을 끝맺지 않고 잠자코 이시가키 선배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왼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외마디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겨우 비명을 씹어삼켰다. 놀란 것은 이시가키 선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한참을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선배는 금세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미도스지, 부끄러우면 굳이 무리해서라도 말 안해도 되는데...손, 안 아프나? 소리가 크게 났잖아.」

「...밥이나 먹그래이.」


그는 짧게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수저를 들어 올리더니 도시락을 들어 올려 입으로 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미도스지, 내일도 같이 점심 먹자, 알았제?」

「......」

대답은 없었다.


홀린 듯이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이런 일에 관여하고 싶었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배까지 살살 아파왔다.

그럼에도 나는 멍청한 나머지, 살짝 열었던 뒷문을 도로 밀어 닫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교실 안쪽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달음박질해 내 반으로 돌아왔다. 청소를 하지 않았으니 선생님께 혼이 나겠지만 그건 이제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잊고 싶었다. 내가 목격해버린 그를.

잠자코 도시락에 집중하기 시작한 이시가키 선배를 곁눈질로 내려다보는 눈빛을, 붉어진 귀를.


그는 그냥 괴물인 채로가 좋았다.

우리를 깔보고 경멸하는, 속을 알 수 없는 여름의 괴이. 조용한 듯 자신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가도 언제든지 이빨을 드러내곤 하는 일그러진 형태의 괴물. 그런 존재로만 내게 기억될 예정이었던 그였다.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무언가를 배척했을 뿐이라는 정당화로 나는 내 어렸던 시절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의 검은자위 너머로 비치는 인간 따위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시가키 코타로라는 남자가 그에게서 끌어낸 인간성의 일부를 엿본 결과는 내게 고통스러운 열병과도 같았다. 봄이 오고 졸업식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학년의 종업식이기도 했다. 나는 그와 반이 바뀔 것이었다.

친구들과 사진을 찍은 후 다급히 그를 찾았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말해두고 싶었다.


「저, 혹시 나 기억하나? 초등학교 때, 그러니까, 그...그때 내가 니를 괴롭혔, 는데...」

그는 굉장히 어리둥절해하는 듯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일 년이나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 이제서야 갑자기 사과해오다니 나 같아도 어이가 없을 터였다.

「그, 그러니께... 미안하다. 내가 나빴대이. 사과하고 싶어서...」

그는 무표정하게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이시가키 선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미 그쪽으로 신경이 쏠린 듯 했다.

「누구랑 착각한 건지는 모르지만, 내는 니 모른대이.」


그는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저쪽으로 휘적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가 졸업장을 손에 든 이시가키 선배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모습을.

아, 미도스지는 그에게만 인간이었다.

2017. 7. 1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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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skin